누가봐도 살해범, 무죄를 남기고 사망.
사법재판의 헛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레전드 재판 사건
한국에서도 우리가 묻지마 살인사건의 작은 죄값의 판결을 절대로 우습게 보면 안된다.
사법제도의 헛점은 많다는 명확한 사례가 OJ심슨 사건이다.
논란의 망나니 OJ심슨의 사망
영원한 무죄이면서 영원한 살인자로 기억되면서 4월 10일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전립선암 투병 끝에 사망했다. 한 때 최고의 미식축구 스타였지만 인종과 형사 사법 제도에 대한 전국적 논쟁을 촉발시킨 살인사건 재판의 주인공이 세상을 떠났다.
오렌설 제임스 심슨은 마이클 조던이 등장하기 전 70년대 미국 최고의 흑인 스포츠 스타 중 1명이었다. 제임스 카메론은 원래 아놀드 슈워제네거 대신 이 사람을 <터미네이터>의 주연으로 캐스팅하려고 했다.
그는 R.I.P하면 안된다. 진짜 살인자라는 건 누구나 아니까.
O. J. Simpson O. J. 심슨
이름 : 오렌설 제임스 심슨 (Orenthal James Simpson)
출생 : 1947년 7월 9일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사망 : 2024년 4월 10일 (향년 76세) 네바다 라스베이거스
배우자
마거리트 휘틀리 (1967년 결혼 / 1979년 이혼)
니콜 심슨 (1985년 결혼 / 1992년 이혼)
소속 팀
버팔로 빌스 (1969~1977)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 (1978~1979)
인생요약
미식축구 명문인 USC(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에 입학하기 전부터 미식축구의 러닝백과 단거리 육상 선수로서 최고의 유망주로 손꼽혔고, 폭발적인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대학 최고의 선수에게 수여하는 하이즈먼 트로피를 1968년 수상했고, NFL 버펄로 빌스에서 9시즌,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에서 2시즌 도합 11년 동안 뛰었다.
운동선수로의 위상만 놓고 본다면 OJ 심슨은 분명히 NFL 한 시대를 대표할 역대 최고의 러닝백들에 거론될 수준의 레전드이고, 하술할 사건과 추문이 없었다면 사실 버펄로 빌스의 역사에 남을 프랜차이즈 스타로 손색이 없는 선수였다.
1985년에는 NFL 명예의 전당 입당 자격이 생기자 마자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다. 끼가 넘쳐서 쇼호스트나 예능, 버라이어티 쇼도 많이 출연했음은 당연지사다. 미식축구에 관심이 없어도 총알탄 사나이를 재밌게 봐서 그의 얼굴을 아는 사람도 많다.
두번의 결혼 두번의 이혼
심슨은 대학교 2학년 때 결혼해 3명의 아이 중 셋째 딸이었던 아렌이 두 살 생일 때 수영장에서 익사하는 불행이 찾아온다. 이혼과정에 있었지만 이 충격으로 심슨은 첫 부인과 완전히 갈라지면서 이혼하게 되었고, 2년 뒤 나이트클럽 웨이트리스로 일하던 당시 18세였던 니콜 브라운과 만나 두 번째 결혼을 하고, 2명의 아이를 낳게 된다. 두 번째 부인인 니콜 브라운과도 1992년에 이혼한다.
여기까지는 그의 평범한 일생에 대한 이야기였다.
O. J. 심슨 사건
보통 한국에서는 날짜를 기준하여 이름을 짓거나, 지역과 사건의 형태를 조합하는데, 미국은 다르다. 너무 유명한 사건이라 그냥 이름에 사건을 붙여서만 말해도 미국인은 누구나 아는 이야기가 되었다.
1994년 6월 12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
당시 용의자로 유명 미식축구 선수 O. J. 심슨이 체포되었으나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났고 진범은 밝혀지지 않았다. 영미법 체계에서는 1심에서 용의자가 무죄 선고를 받으면 검찰이 항소할 수 없기 때문에 심슨은 1심에서 무죄로 확정되었다.
가정폭력과 젠더 갈등, 미국 사회 특유의 계급 및 인종 갈등, 확률과 통계의 함정 등 여러 분야에서 상징적인 부분이 많아 법학과 사회학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많이 인용하는 사건으로, 미국 형법 체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사건이다.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현재까지 거론될 만큼 유명한 사건.
O. J. 심슨 사건
O. J. Simpson murder case People of the State of California v. Orenthal James Simpson
그의 살인 혐의와 관련된 재판은 심슨이 당대 최고의 선수였고 이른바 ‘흑인 성공의 아이콘’이었다는 점에서 ‘세기의 재판’으로 불리며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1992년 로스앤젤레스(LA) 폭동 사건의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미국 사회에 남아 있는 인종 갈등을 여실히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는다는 점에서 사회적 의미가 있다.
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일반인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이 무죄 평결을 내리면서 미 형사사법 제도를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인 배심원제의 불완전성을 그대로 드러낸 사건으로 지금도 회자된다.
뛰어난 운동선수이자 ‘성공한 흑인’
심슨의 가족은 11일 X(옛 트위터)에 올린 짧은 글에서 그가 10일 암 투병 끝에 사망했다고 밝혔다. 뉴욕 포스트에 따르면 전립선암을 겪은 그는 이날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숨을 거뒀다.
심슨은 운동선수로서는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는 렌터카 회사 등 대기업의 광고를 찍기도 했는데 당시만 해도 흑인 선수들에게는 보기 드문 ‘성공’ 사례였다. 하지만 그의 황금기는 여기까지였다.
심슨은 1979년 첫 아내와 이혼한 뒤 1985년 두 번째 아내인 니콜 브라운과 결혼했다. 이후 1992년 브라운은 이혼을 신청했고 둘은 결국 갈라섰다.
모두의 눈앞에서 몰락한 수퍼스타
1994년 6월 13일 새벽 미국 캘리포니아주 브렌트우드 주택가에서 심슨의 전처 니콜 브라운과 애인 론 골드먼이 흉기에 찔려 피투성이가 된 채 발견됐다. 경찰은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장갑과 같은 켤레의 피묻은 장갑을 심슨의 집에서 발견하고 그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경찰에 출두하겠다고 한 심슨은 "나는 니콜의 죽음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편지를 남긴 뒤 도주했고, 흰색 SUV 차량을 타고 도주하는 그를 경찰이 LA 고속도로에서 추격전을 벌여 붙잡았다. 이 라이브도 상당히 유명하다.
미 방송사들은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100km 이상 계속된 이 추격전을 생중계했고, 약 9500만명이 시청했다. 경찰과 대치 끝에 차에서 내린 인물은 흑인들의 영웅이자 전설적인 스포츠 스타인 심슨이었다. 눈앞에서 수퍼스타의 추락을 목격한 미 전역은 충격에 휩싸였다.
O. J. 심슨은 1994년 전처를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지만 배심원단에서 무죄 평결을 받고 풀려났다. 사진은 그가 범행 당시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가죽장갑을 심슨이 법정에서 착용하는 모습. 장갑이 손보다 작았고, 그의 무죄 평결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법정을 삼킨 인종문제
LA 검찰은 6일간 조사 끝에 심슨을 살인혐의로 기소했다.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피 묻은 왼쪽 장갑에서 심슨의 DNA가 검출됐고, 심슨의 양말에서 니콜의 DNA가 나오는 등 확보한 증거는 심슨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심슨은 그동안 모았던 재력을 바탕으로 6명의 초호화 변호인단을 꾸렸다. 당시 ‘드림팀’이라고 불린 이들은 정확한 액수가 공개된 적은 없지만 500만 달러 이상의 수임료를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만 해도 엄청난 금액이다.
모두가 심슨의 유죄를 확신했던 이 사건은 법정 공방을 거치며 조금씩 변해갔다.
심슨의 변호인단은 증거가 인종차별주의자인 경찰들에 의해 조작됐고, 경찰의 증거 초기 확보도 부실했다며 빈틈을 파고들었다. 특히 심슨은 재판 과정에서 검찰이 범행에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가죽장갑을 착용했는데, 심슨의 손에 전부 들어가지도 않을 만큼 사이즈가 작았다.
눈앞에서 이를 본 배심원단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변호인단이 372일간 인종차별에 대한 여론몰이와 증거 부실을 파고든 결과 1995년 10월 3일 미국 배심원들은 4시간도 채 되지 않아 ‘무죄’ 평결을 내렸다.
살인 직전에 일부러 작은 장갑을 준비한 것이라면?
당시 심슨의 평결이 발표되던 순간 TV 시청률은 걸프전 때를 능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심슨은 무죄평결의 기쁨 속에 흰색 밴을 타고 LA 카운티 교도소를 떠났다.
누가봐도 돈을로 처바른 무죄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법 제도의 허점
심슨 사건은 미국 사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배심제’라는 형사 사법 제도에 대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심슨의 변호인단은 배심원 12명 중 9명이 흑인이라는 점을 공략 포인트로 삼아 집요하게 ‘경찰의 인종차별’ 문제를 파고들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창피한 사법 판결
일반인으로 구성된 배심원들은 눈앞의 증거물보다 변호인단이 펴는 감정적 수사법에 휩쓸리기 쉬웠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심슨이 범인이라는 상당한 과학적 증거와 정황증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배심원은 무죄평결을 내렸다”면서 “이 재판은 사법재판사에 오점을 남겼다”고 했다.
패배한 것은 검사들이 아니라 이 나라의 사법제도
형사재판에서는 무죄 vs 민사재판에서는 유죄
피해자인 골드먼의 아버지는 “패배한 것은 검사들이 아니라 이 나라의 사법제도”라고 하기도 했다. 미 사법 제도상 1심에서 무죄가 난 사건은 검찰이 항소를 할 수 없어 그대로 확정된다.
전처의 부모는 끝까지 심슨이 딸을 죽인 법인이라고 주장해 민사법원에서는 심슨에게 배상금 3350만달러를 유족에게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형사재판에서는 무죄였지만 민사재판에서는 유죄로 보는 모순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수임료 내고 거지가 되다.
비록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났지만 재판 과정에서 변호사들에게 엄청난 수임료를 준 탓에 출소 후의 그는 알거지가 되었고, 명성에도 큰 타격을 받았다. 사실상 선수 시절의 명예는 없어졌다. 국민 모두가 그를 살인자라고 당연하게 알고 있다.
이후 심슨은 다른 사건으로 무장강도 사건에 연루돼 9년간 복역했다가 2017년 가석방으로 풀려나며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
1990년대 미 사회에 존재하던 고질적인 인종 갈등 문제와 사법 체제의 허점을 민낯 그대로 투영한 ‘O. J. 심슨 사건’이 발생한 지 정확히 30년 되는 올해까지 이 사건은 미제(未濟)로 남아 있다. 그리고 답을 알고 있는 심슨은 영원히 입을 열 수 없게 됐다.
출소 직후 1995년에는 자신의 재판 과정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밝힌 《I Want to Tell You: My Responses to Your Letters, Your messages, Your Questions》라는 책을 출간했다.
1997년 피해자 니콜과 론 골드만의 유가족들이 제기한 민사소송에서는 패소 판결을 받고 배상금으로 총 3,350만 달러(한화 약 370억 원)를 유가족에게 지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회사를 설립하고, 온갖 재산을 빼돌리는 등 법의 함정들을 이용하여서 O.J. 심슨으로부터 2017년 8월까지 유가족들은 100만 달러조차 받아내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O.J. 심슨은 진짜로 돈이 없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수백 달러 규모의 세금도 못내서 탈세혐의로 수감되었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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