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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아카이브

여제자들을 황국의 여성이 되라했던 '김활란' (아마기 카츠란)

by protocall 2024. 4. 9.

극친일파 대모 이화여대 초대총장

친미-친일-친미로 변신하며 살다간 친일 여성의 대모 김활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교육인, 언론인, 사회운동가, 친일반민족행위자. 이화학당 졸업생, 이화여자전문학교 7대 교장이자 최초의 한국인 교장이며 이화여자대학교의 초대 총장, 학교법인 동구학원의 설립자이다. 교육받은 여성이 적었던 시대에 박사 학위를 취득한 김활란은 당시 엄청난 명성을 가졌지만 조선 여성들을 정신대로 유도했을 정도로 악질적인 친일파이기도 했다.

 

여성 제자들을 일본에 성상납시킨 '김활란' (아마기 카츠란)

 

김활란 (金活蘭) Helen Kim

친일이름 : 아마기 카츠란

출생 : 1899년 2월 27일 경기도 인천부
사망 : 1970년 2월 10일 (70세) 서울특별시

제2대 공보처 차장 (이헌구와 공동 재임)
1950년 6월 28일 ~ 1950년 8월 14일
제3대 공보처장
1950년 8월 15일 ~ 1950년 11월 25일

 

 


 

오늘날 존경받을 필요없는 그냥 유기체이지만, 생애는 알아보자

 

1899년 2월 27일에 인천광역시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적 이름은 '김기득(金己得)'이었다. 개신교인으로 신앙이 깊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7세 때 가족 전체가 세례를 받았고 '헬렌'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헬렌'이라는 세례명을 한자식으로 고쳐 '활란'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름이 '김활란'이 되었다.

 

뭐 공부를 쓸때없이 많이 했는데, 이후에 일어날 친일 행적에 비추면 다 알필요도 없는 쓰레기 정보라서 생략하기로 한다.

1926년 4월 26일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황제가 이화학당의 전체 학생에게 깃광목으로 상복을 입히고 창덕궁 앞에서 망곡을 하게 하였다가 주모자로 잡혀서 종로경찰서의 감옥에 갇혔다.

 

여성 제자들을 일본에 성상납시킨 '김활란' (아마기 카츠란)
아마기라고 하모니다


1927년 1월 전문직 여성들의 친목 모임인 '망월 구락부'가 '직업 부인회'로 개편될 때 실행 위원에 선정되었다. 이 시기 김활란은 계몽 운동과 인권 운동에 힘쓴 동시에 오히려 독립운동에 가까운 행보를 보였다.

농촌 교육을 통한 문맹 퇴치와 계몽 활동에 주력하는 한편 개신교 단체 활동도 활발히 전개했다. 1939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이화여자전문학교 제7대 교장이 되었고 1942년에 사위 조석봉 등과 함께 동구여학교를 세웠다. 여기까지만 했으면 독립운동가로 대접받고 칭송받는 위인으로 끝날 수 있었으나, 이후 행적들이 친일 대모로 만들어진다.

 

 


김활란의 친일 행적

1936년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했다.

'아마기 카츠란'이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한 것은 물론이고 1936년 말부터 갑자기 교육과 여성 계몽 분야에서 친일 활동에 적극적으로 앞장서기 시작했다.

 

이 아줌마 왜이래..

 

조선총독부 관제 단체에는 거의 다 참석할 정도로 영혼을 걸고 친일파가 되었다.

매일신보에 정신대 참여를 적극 독려하는 글을 수백 편 쓰는가 하면 내선일체 찬양글도 많이 썼다.

 

1938년의 윤치호 일기를 보면 윤치호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석방을 위해 애쓰는 것에 대해서 김활란이 분노했다는 대목이 있는데 이것만 봐도 김활란의 변절이 얼마나 철저했는지 짐작이 간다. 당시 김활란과 함께 친일반민족행위에 앞장섰던 여성계 지도자들이 박마리아, 모윤숙, 노천명 등이다.

 

 

 

매일신보에 정신대 참여를 적극 독려하는 글을 수백 편 쓰기도 했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자신이 졸업한 이화여자전문학교(졸업 당시에는 이화학당 대학부) 학생들에게도 정신대 참여를 독려한 것이다.

 

 

 

황국(일본제국) 여성으로서 사명을 완수해달라는 글

아세아 10억 민중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한 결전이 바야흐로 최고조에 달한 이때 어찌 여성인들 잠자코 구경만 할 수가 있겠습니까....(중략)... 싸움이란 반드시 제일선에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학교가 앞으로 여자 특별 연성소 지도원 양성 기관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인 동시에 생도들도 일본제국 여성으로서 다시없는 특전이라고 감격하고 있습니다.

 

김활란,「매일신보」(1943.12.25)

 

여성 제자들을 일본에 성상납시킨 '김활란' (아마기 카츠란)
당시 황국의 여성이 되라는 강요를 받던 어린 이화 학생들

 

이화여자전문학교 학생들을 비롯해 당대 여성들에게 정신대 참여를 적극 독려하는 글을 수백 편 쓰는가 하면 내선일체 찬양글도 많이 썼다. 친일 활동을 한 것을 생각하면 과분하게도 당시 조선 최고의 지식인 여성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내내 김활란의 명성은 높았고 존경받았다.

 

 


광복 후 행보

8.15 광복 후 1945년 9월 미군정청 한국교육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으며 1945년 10월 이화여자전문학교를 복구하여 교장을 맡았다. 1945년 12월에는 이승만계 단체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가담하고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전개했으며 한국 YWCA를 다시 재건해 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6.25 전쟁 중이던 1950년 공보처 제3대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1952년 1월부터 1954년까지 영자 신문 <코리아타임즈> 사장을 맡았다.

 

김활란은 이승만 지시로 모윤숙이 주도하여 1951년에 설립한 '낙랑클럽'의 총재를 맡은 적이 있다. 문제는 이 단체가 겉으로는 이화여대 출신으로 구성된 고급 외국인 대상 사교클럽인데, 실제로는 미군 로비를 위한 매춘 단체라는 의혹으로 남겨졌다.

 

극친일 행보에 비해 처단없이 잘 살아남았다. 당시에는 공부한 여성지도자라는 명성이 잘 커버해 준 것 같다.

 


낙랑 클럽

김활란은 해방 이후 모윤숙과 함께 '낙랑 클럽'이라는 고급 사교단체를 조직하였다. 문제는 이 단체가 주한외교사절, 미국 고위관리, 미군 고위장성 등을 파티에 초대하여 접대하고 정보를 빼낼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였다는 것.

 

특히 낙랑클럽은 이화여전 등의 명문 여자 대학생 출신으로 이뤄졌다.

모윤숙이 주도하여 설립한 '낙랑클럽'의 총재는 김활란이였다. 낙랑클럽이 겉으로는 여성들로 이루어진 민간 외교 단체지만 유사 매춘 그룹이라는 지적이 짙다. 낙랑클럽의 로비 문제를 조사한 미군 CIC의 조사보고서에서도 낙랑클럽은 '로비를 위한 고급 호스티스 단체'라고 규정하고 있다.

 

여성 제자들을 일본에 성상납시킨 &#39;김활란&#39; (아마기 카츠란)

 

90년대 중반 중앙일보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가 비밀해제한 문서에서 발견하여 폭로하면서 널리 알려졌는데, 당시 국내 주둔하던 미군의 정보기관인 CIC가 작성한 비밀 문서에 기록된 이 단체의 실체는 다음과 같다.

 


 

CIC 비밀 문서의 내용

낙랑클럽 이 단체의 목적은 외국귀빈, 한국정부 고위관리 및 미군장성, 주한 외교사절 등을 접대하기 위한 것이다. 이 단체의 회원은 한국의 모 일류 여대를 졸업한 교육받은 여성들이다. 영어를 할줄 아는 매력적인 여성들로 교양있는 호스티스였다.

 

여성 제자들을 일본에 성상납시킨 &#39;김활란&#39; (아마기 카츠란)

 

이 클럽을 앞장서 조직하고 이끌고 있는 사람은 YWCA 총재이자 저명한 시인이다. 낙랑클럽 회원들은 기혼, 미혼, 무직, 직업 여성등 다양한 인적구성을 보이고 있으며, 초기에는 회원수가 1백 50명에 달했다.

 

외국인 접대행위는 몇몇의 경우 외국인의 정부(情婦)가 되는 일로 발전되기도 했다. 실례로 낙랑클럽 조직 구성에 참여했던 한 여성은 부산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영관급 장교의 정부(情婦) 노릇을 했다. 낙랑클럽은 부산 피난시절에도 미군들을 상대로 접대행위를 계속했는데, 부산 주둔 미국의 한 관리는 이 클럽 회원들이 심지어 군 막사에까지 들어오고 있다고 전했다.

 

여성 제자들을 일본에 성상납시킨 &#39;김활란&#39; (아마기 카츠란)

 



미국 현지에서 발행된 신문 기사를 인용한 CIC의 공개 내용
한국에서 가장 전설적인 여성은 한국 여성 2백명을 주한 외교관등을 접대하기 위해 자유당의 접대부로 조직한 시인이자 정치인 모윤숙 이다. 

 

 

모윤숙 덕분에 이승만은 유엔사령부가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을 사전에 알 수 있다. 부산에 있는 낙랑 클럽의 지도부는 사회적인 지위와 명성을 갖춘 중년 여성들로 구성돼 있으며 이들은 군장성과 외교관들을 위해 항상 파티 계획을 세우고 있다.

 

어느날 밤 파티에서 한 젊은 참석자가 자신이 기대했던 것보다 10년은 더 나이 먹은 여성이 접대하러 나오자 화를 내면서 항의했다. 그러자 15분 안에 한국정부 고위 관리가 젊은 낙랑 회원을 대동하고 나타났고 나이 먹은 낙랑 회원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낙랑클럽 여성들은 두가지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데 밤에는 한복으로 곱게 차려입고 불빛을 받으며 고위 관리들을 접대하고, 낮에는 한국군을 접대하기 위한 물품들을 구하기 위해 미군 막사의 문을 노크한다.

 

 


 

이화여자대학교의 변호

이화여자대학교도 비판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아직도 이런 극친일파 인물을 옹호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심지어 1999년엔 학생들도 옹호했다. 그것도 아주 터무니없는 이유로 옹호했다.

 

요약하자면 김활란 비판 = 가부장적, 여성에 대한 억압적 속성, 여성주의에 대한 남성의 백래시였다. 즉 김활란의 과오를 거론하는 건 남성이 만든 가부장제를 옹호한 거나 마찬가지로 생각한 것이다.

 

교육계 여성들의 일본제국에 대한 친일의 기억과 망각으로 비판 받았다.


 

김활란은 죽기 얼마전까지 존경과 덕망속에서 살다 70년 사망했다.

그녀의 친일과 친미를 위한 여성들을 이용한 접대의 기억은 높이 하늘에 있다.

 

여성 제자들을 일본에 성상납시킨 &#39;김활란&#39; (아마기 카츠란)
1965년 자서전 출판기념회에서 김활란과 김옥길... 우리 무덤까지 가져갑시다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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